제17장

강태준은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욕망이 서렸다. 그는 큰 손으로 윤진아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제 이혼하라고 재촉 안 해?”

윤진아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그가 자신을 김지연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쌍년!

그녀는 강태준이 드디어 진심으로 자신을 받아주려는 줄 알았다. 성인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탐하듯,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속 깊이 기뻐하며 온몸과 마음을 바칠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그녀가 한껏 달아오른 순간, 현실은 인정사정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잠시 슬픔에 잠겼던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강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쪽,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몇 번 입을 맞추던 그는 품 안의 여자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순식간에 흥미를 잃었다.

“3년이나 됐는데, 여전히 통나무 같네.”

그는 질색하며 한마디 툭 던졌다.

윤진아는 그를 부축해 안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희미한 노란 불빛의 플로어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옆에 누운 남자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윤진아는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와 그녀는 이 침대에서 관계를 가졌겠지?

강태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바로 김지연이었다.

윤진아는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여자, 그녀도 편하게 놔둘 순 없지.

그녀는 맨발로 살금살금 나가 거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사실 김지연이 그에게 전화한 건 별일 아니었다. 할아버님은 그녀가 본가에서 무료하게 늙은이인 자신과 매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출장에서 돌아온 손자 생각이 났다. 그래서 어서 전화해서 그를 불러오라고 재촉한 것이었다. 본래 의도는 젊은 부부가 정을 더 쌓아서 빨리 증손자를 안겨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할아버님이 바로 옆에 앉아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기에, 김지연은 마지못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맞은편에서 여자의 야릇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태준 오빠, 살살…….”

“태준 오빠, 너무해…… 아…….”

김지연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고, 얼굴은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회장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망할 놈이 뭐라고 하더냐?”

김지연은 입술을 떨었다. 그녀는 할아버님께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차마 말할 수 없었고,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거짓말 한마디조차 꾸며내지 못했다.

회장님은 바닥에서 휴대폰을 주워 들어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차마 귀에 담을 수 없는 소리가 그의 서재 전체에 울려 퍼졌다. 회장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몇 번이나 세게 내리쳤다.

“이 무슨 망조냐. 강씨 집안에서 어쩌다 저런 놈이 태어났을꼬. 얘야, 우리 강씨 집안이 네게 면목이 없구나. 네 할머니의 부탁을 저버렸으니, 이 늙은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마음씨 고운 회장님은 3년 전, 그 망할 놈을 억지로 이 아가씨와 결혼시킨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아이를 보살펴주고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그녀를 해친 꼴이 되어버렸다.

김지연은 감정을 추스르고 할아버님을 위로했다.

“할아버님, 저는 괜찮아요. 화내지 마세요. 혈압에 안 좋아요.”

그녀가 그 말을 막 끝낸 순간, 회장님이 쓰러졌다.

그날 밤 강씨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온 가족이 회장님을 모시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차가운 철문 밖에서 가족들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의사 선생님이 안에서 나왔고, 온 가족은 숨을 죽인 채 의사 선생님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회장님은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아직 위험한 시기는 벗어나지 못했으니 24시간 동안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보호자분은 저와 함께 진료실로 가시죠.”

강승안과 강지환이 따라갔고, 다른 사람들은 응급실 문밖을 지켰다.

강예성은 살벌한 눈빛으로 김지연을 쏘아보았다.

“네가 할아버지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분명 네가 할아버지를 자극해서 급성 심근경색이 온 걸 거야. 보아하니 넌 우리 집안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구나.”

김지연은 여전히 걱정과 슬픔에 잠겨 있었다.

“강예성, 할아버님은 아직 응급실에 계셔. 너랑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

강예성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김지연, 할아버지는 너 때문에 쓰러지신 거야. 이 쌍년아, 대체 언제까지 우리 강씨 집안을 망칠 셈이야?”

김지연은 옆에 서 있는 시어머니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서서, 마치 자기 딸의 무례한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의 이런 방관적인 태도가 강예성의 안하무인한 성격을 만든 것이었다.

평소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줬음에도, 지금 김지연의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인상은 크게 깎여나갔다.

강예성 같은 태도는 심하게 말하면 교양이 부족한 것이었고, 재벌가 아가씨에게서 나와서는 안 될 모습이었다.

김지연의 시선이 몇 사람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걸렸다.

강예성은 모욕감을 느꼈다. 자기가 분명히 욕을 하고 있는데, 이 쌍년은 대체 무슨 태도란 말인가?

“뭘 쪼개?”

김지연은 그녀를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벽에 붙은 정숙 표지판을 가리켰다.

“조용히 해. 여긴 병원이야. 남들 보기 창피하게 굴지 말고.”

“너…….”

강예성은 한참 동안 시비를 걸었지만, 완전히 무시당했다. 그녀 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데, 김지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했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김지연의 뺨을 향해 후려쳤다.

김지연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따귀를 고스란히 맞았다. 한쪽 뺨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듯 화끈거렸다.

그때 시어머니 정지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몇 마디 쏘아붙였다. “예성아,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가 있니! 어서 사과해!”

강예성은 오냐오냐 자라 할아버님과 강태준 외에는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김지연의 뺨을 향해 휘둘렀다.

이번에는 김지연이 따귀가 떨어지기 전에 가볍게 강예성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그대로 되갚아주었다. 짝,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강예성의 얼굴에 울려 퍼졌다.

“강예성. 할아버님은 아직 저 안에 계셔. 널 건드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자꾸만 시비를 걸어왔고, 나도 가만히 서서 맞고만 있을 수는 없지. 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김지연은 강예성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신체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강예성이 몇 번 더 발버둥 치며 반격하려 했지만, 손목이 김지연에게 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이 뒤엉켜 몸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지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렸다.

그때, 강승안과 강지환이 의사 선생님 진료실에서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김지연이 강예성을 붙잡았던 손을 놓자, 다음 순간 그녀가 다시 달려들었다. 기어이 승부를 보겠다는 기세였다.

김지연은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뒤로 피하기만 했다.

이 장면을 강승안과 강지환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멀리서 보기에는 영락없이 강예성이 김지연을 쫓아다니며 때리고, 김지연은 계속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할아버님께서 아직 안에 계시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강승안이 명백히 화를 내자, 강예성은 그제야 잠잠해지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빠, 쟤가 저 때렸어요.”

강승안이 버럭 소리쳤다. “닥치지 못해!”

김지연이 강예성에게 잡아 뜯겨 망가진 옷을 정리하는데, 머리 위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강지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지환.”

그의 시선이 어색했던 그녀는 ‘지환’이라고 부르며 멋쩍음을 달랬다.

강지환이 긴 다리로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지연아, 나 좀 따라와.”

“어디를요?”

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지만, 강지환은 말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김지연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김지연이 엘리베이터 거울로 그를 슬쩍 훔쳐보다가 강지환에게 딱 걸렸다.

“쟤가 때리면 너는 되받아치지도 못해? 왜 그렇게 당하고만 살아?”

김지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때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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